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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 소개 블로그
(위 사진은 프란츠 2세) 1차~3차 대프랑스 동맹만 간략하게 언급하다보니 나폴레옹의 활약과 프란츠 2세의 굴욕만이 주로 언급되었습니다. 아마 추후에 영상을 만든다면 오히려 역전된 역사적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네요. 1~3차 대프랑스 동맹(나폴레옹의 등장,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https://youtu.be/ozLCjSmou04 위는 1~3차 대프랑스 동맹 관련 영상 링크입니다. 이걸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영상에서 줄글이 하도 길어서 블로그에 다 담기가 애매했습니다. 그리고 글로 스포하면 애초에 영상 만드는게 더 힘든 편인데 많이 봐주지 않으실 거 같다는 조금의 이기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ㅋㅋ 그래도 명색이 블로그 글이니 어느 정도 순서만 간략하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대프랑스 동맹에서는 프랑..
누구나 한 번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생각해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조금만 배워도 그 사회가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게 됩니다. 다만 이런 사회주의 경제 이론도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해나가 알게 모르게 시장 경제 체제에도 영향을 주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흔히 좌익의 어원은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 당입니다. 국민공회 회의 때 의장석을 기준으로 급진주의인 자코뱅이 좌측에 앉아 좌파, 온건파인 지롱드가 우측에 앉아 우파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자코뱅이란 교조주의(구체적인 다른 환경들을 고려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 명제를 신봉하려는 사상)와 급진주의로 의회를 장악한 혁명 세력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코뱅파의 대표는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였는데 그는 급진적인 개혁 시행을..
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뽑으려고 합니다. 근데 문제는 흠 ... 아무리 주관적으로 다양하게 뽑으려고 해봐도 시기는 거의 비슷하네요. 참고로 전쟁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TOP7 르제프 공방전 독일이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최고의 방어전. 발터 모델이 이끄는 9군이 200만의 소련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막아내고 여세를 몰아 울퉁불퉁한 르제프 돌출부를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전략'에 의해 독일 포병의 집중포화와 예비대의 신속한 증원에 오히려 역으로 포위되어 각개격파당했다. 또한 전선의 재배치의 필요성을 느낀 독일군은 비밀리에 군사들과 반소련 성향의 러시아인들을 3주의 작전 끝에 성공적으로 퇴각시켰다. 이것이 들소 작전으로 현재까지도 독일 군사..
위는 합스부르크가의 문장. 이번 포스팅은 합스부르크가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지금이야 합스부르크가는 600년 이상 유럽의 왕실을 이어온 역사 깊은 명문가로 불리우지만 처음에는 그저 이름없는 신생 가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한동안 공석이었던 대공위 시대의 일입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리가 공석인 원인에는 교황이 있었죠. 종교적 신념이 강했던 당시 중세 때는 교황의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심지어 교황이 황제를 웃도는 권력을 갖기도 했었는데 그런 권력을 유지했던 것의 기반이 되었던 특권 하나가 바로 파문입니다. 파문이란 건 더 이상 교단에 속해있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스웨덴은 베르나도테 왕가로 2018년 시점으로 칼 구스타프 16세가 베르나도테 왕가의 7번째 왕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베르나도테는 다름 아닌 나폴레옹의 직속 원수였습니다. 베르나도테 왕조의 문장을 보면 왼쪽이 스웨덴의 정통 바사의 왕가 문양이고 오른쪽이 과거 나폴레옹 제국 시절 프랑스를 상징하던 문양입니다. 바로 독수리가 나폴레옹 1세를 상징하는 독수리를 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베르나도테 왕가는 지금까지 나폴레옹이 세운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입니다. 어떻게 프랑스의 장군이 스웨덴의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쿠데타로 들어섰다면 당연히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조를 이어나갈 순 없었으니까요. 배경은 나폴레옹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남부의 부유한 법률..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역사상 가장 많은 지원국이 한국을 지원하였다고 하죠. 그 중 하나가 바로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하일레 살라시에는 무려 왕실근위대를 강뉴(칵뉴) 대대로 편성하여 직접 파견하였습니다. 위는 하일레 셀라시에. 강뉴라는 것은 '혼돈에서 질서를 세운다'라는 뜻으로 이 대대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253번이나 싸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상자가 발생할지라도 포로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선택지란 전투에서 이겨서 살던지 혹은 싸우다 죽던지밖에 없었으니 타국의 전선에서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투가..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보스니아 지방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사라에보 사건입니다. 이 암살을 실행한 범인은 세르비아의 한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로 블랙 핸드라는 비밀결사 소속이었습니다. 위는 가브리엘 프린치프 사진. 오스트리아는 이 배후에 이 조직은 세르비아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고 확신하고 바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날립니다. 그리고 수도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하죠.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 영향을 뻗치고 동시에 같은 슬라브 민족 국가의 후견인을 자처했기에 이에 동조했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번진 이유는 유럽 정세에 잘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의 세력은 3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