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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일대기 본문

세계사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일대기

겜리뷰 2018. 6. 1. 12:24

 

위는 합스부르크가의 문장.

 

 

이번 포스팅은 합스부르크가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지금이야 합스부르크가는 600년 이상 유럽의 왕실을 이어온 역사 깊은 명문가로 불리우지만 처음에는 그저 이름없는 신생 가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한동안 공석이었던 대공위 시대의 일입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리가 공석인 원인에는 교황이 있었죠.

종교적 신념이 강했던 당시 중세 때는 교황의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심지어 교황이 황제를 웃도는 권력을 갖기도 했었는데 그런 권력을 유지했던 것의 기반이 되었던 특권 하나가 바로 파문입니다. 

파문이란 건 더 이상 교단에 속해있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로 카노사의 굴욕이 있습니다.

 

 

 

위는 카노사의 굴욕을 표현한 그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두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대립했던 사건입니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자 밑의 주교들은 교황을 지지하고 나섰고 왕을 교체하는 논의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하인리히 4세는 눈밭에서 교황이 있는 성 문앞에서 금식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고 전해집니다.

 

위는 워털루 전투 삽화.

 

 

어쨌든 얘기가 좀 샜는데 이런 막강한 권한을 당시 교황이 남발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도처에는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각종 분쟁이 발생하였기에 그 누구도 황제를 맡는 것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태가 지속되자 제후들은 독일의 왕으로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가문을 하나 허수아비로 세우고자 하였고 그것이 합스부르크가에서 처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루돌프 1세입니다. 그러나 제후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루돌프 1세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유럽의 유력 가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문가인 룩셈부르크 가문을 제치고 나중가서는 프로이센을 제외하고 전유럽이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러나 이런 합스부르크가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독일 내 신교도와 카톨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 전 유럽국가가 독일이라는 한 국가에서 엉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30년 전쟁입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간신히 전쟁은 끝났지만 독일의 전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독일의 각 영방은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화되었고 합스부르크가의 주 활동 반경은 오스트리아로 한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새로 개정한 준살리카법에 따라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구실로 프로이센, 프랑스가 영토를 침략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이라는 큰 땅을 프로이센에 잃어버리고 간신히 영국의 도움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이를 갈면서 그동안 라이벌이었던 부르봉 왕조와 화해 및 동맹을 맺고 7년 전쟁을 벌였고 별 수확없이 패배하고 맙니다.

거기다 나중에 프랑스를 쥐어잡겠다는 의미로 정략결혼을 했던 왕비가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와 함께 몰락하게 되는데 이 때 합스부르크가에서 보낸 왕비가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이후에 포병 장교였던 나폴레옹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며 이탈리아 총사령관을 맡게 되는데 첫 전쟁 무대라고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박살내버립니다.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쿠데타까지 일으키며 황제가 되자 대프랑스 동맹을 구성하며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역시 패배합니다.

이 패전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은 아예 해체되어버리고 독일의 공국들이 프랑스편에 붙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 공국들을 묶어 라인 동맹을 만들게 됩니다.)


거기에 프랑스의 입김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게도 패해 왈라키아 공국까지 넘겨줬고요. 합스부르크가에서는 독일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지는 않을까 위기를 느끼고 부랴부랴 오스트리아 지역만을 놓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시 선포했습니다.

굴욕적으로 패배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가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대부분의 병력이 몰살당했을 시기입니다.


이 때 다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영국과 함께 6차~7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참가하면서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점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수도 빈에서 구왕정시대로 돌아가는 모토를 담은 일명 빈체제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퍼져있던 당대 사회에서 절대왕정을 유지하기는 어려웠고 다른 강대국들은 막 개막한 제국주의 시대에 맞추어 식민지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시민 혁명으로 수상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며 빈체제는 몰락합니다.

거기에 빌헬름 1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과 당시 대독일주의냐 소독일주의냐를 놓고 통일전쟁을 벌였다가 불과 7주만에 패배하는 굴욕을 겪습니다. 이로서 강제로 통일에 배제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2번째로 민족 구성 비율이 높았던 헝가리인들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중 제국이라는 것은 의회는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황제가 두 지역 왕을 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보스니아 지방의 도시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세르비아 <블랙 핸드>의 일원이었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추축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과 함께 패배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끝나고 맙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을 650년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정략결혼입니다. 정략결혼을 통해 프랑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 스페인, 보헤미아, 헝가리 등 아군을 직접적으로 만들어나갔고 이는 외교적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를 견제하는데에 큰 이점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공동 통치를 금지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았고 장자가 직접 통치하되 나머지 아들들은 행정 관리를 맡아 왕을 보조하는 제도를 채택했습니다.

거기다 카를 6세가 국서조칙을 써놓아 준살리카 법칙을 도입하며 직계 남성이 없을 경우 대신 직계 여성이 왕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후대 제국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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