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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근위대까지 파병한 에티오피아, 그리고 참전 용사들의 아픔 본문

세계사

6.25에 근위대까지 파병한 에티오피아, 그리고 참전 용사들의 아픔

겜리뷰 2018. 6. 1. 12:15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역사상 가장 많은 지원국이 한국을 지원하였다고 하죠.

그 중 하나가 바로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하일레 살라시에는 무려 왕실근위대를 강뉴(칵뉴) 대대로 편성하여 직접 파견하였습니다.

 

 

위는 하일레 셀라시에.

 

강뉴라는 것은 '혼돈에서 질서를 세운다'라는 뜻으로
이 대대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253번이나 싸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상자가 발생할지라도 포로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선택지란 전투에서 이겨서 살던지 혹은 싸우다 죽던지밖에 없었으니 타국의 전선에서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투가 끝나고 나서 전우들의 시신을 몽땅 옮겼는데 이는 부대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는 무엇때문에 우리나라에 이런 파격적인 행동을 취한 것일까요?

배경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는 제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혹은 에티오피아 전쟁) 사진.

 

무솔리니를 주축으로 한 파쇼 정권이 들어선 이탈리아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식민 정책을 추진합니다. 결국 1935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무력으로 침공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입니다.

에티오피아에게는 80만의 군대로 이탈리아보다 숫자 자체는 많았지만 제대로 된 항공기나 전차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나치 독일을 함께 상대할 대독 공동전선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가 침략당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침략군에 맞서 용감히 방어전을 펼쳤고 크리스마스에 맞춰 공세를 진행해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생화학 무기인 독가스까지 살포하면서 밀어붙였고 결국 에티오피아의 주력군은 붕괴하고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되게 됩니다.

수도가 함락되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이탈리아는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로 세우며 동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모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을 수립합니다.

이에 하일레 셀라시에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해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강하게 규탄하였습니다. 이러한 호소로 국제연맹은 이탈리아를 비난하고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하였으나 애초에 국제연맹이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 기구였기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중점은 독일과 일본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있던 아프리카 지역에 강대국들이 큰 관심을 가질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혼자 맞서야 했던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자원적/인적 침탈, 인종차별적 대우에 맞서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41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며 긴 억압에서 해방되고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는 복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결국 두번째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국제연맹은 해체되고 새로운 기구인 국제연합(현재 UN)이 창설됩니다. 여기에서 하일레 셀라시에는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다시는 우리와 같은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소국을 도와주자'라는 집단안보를 주장합니다.

유엔은 이런 집단안보를 수용했고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는 직접 근위대까지 파견하며 그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싸운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했습니다.

1970년부터 대규모 가뭄이 발생하면서 대기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황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사태를 방관하고 은폐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다른 기득권층은 대기근에 시민들이 고생하건 말건 상관을 쓰지 않았죠. 

이런 혼란을 틈타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하일레 셀라시에를 폐위시키며 공산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멩기스투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들, 반공 인사들을 모두 강하게 탄압했습니다. 여기엔 목숨 걸고 전쟁을 치루고 온 강뉴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영장 없이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했고 조국과 자유를 위해 싸운 그들은 핍박을 피해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새로 집권한 공산정권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부정부패와 무능함 때문에 경제가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기에 참전용사를 포함해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열악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희생하신 에티오피아 근위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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